▲ 이미경 한국경제 기자는 화장지 판매대 일부가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1주치 식량은 사두자”…3단계 가능성에 ‘사재기’ 조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 한경닷컴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나요? 혹시 사재기가 일어나 화장지가 품절된 것처럼 보이시나요?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기자의 자질이 충분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트 화장지 코너 판매대 일부가 비어 있다고 사재기 조짐이 보인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경 한국경제 기자는 화장지 판매대 일부가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1주치 식량은 사두자"... 3단계 가능성에 사재기 조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자는 "지난 16일 영등포구 한 대형마트에서는 곳곳에서 쇼핑 카트 한가득 생필품을 담는 소비자를 만날 수 있다"면서 "평소에는 2묶음씩 사는데 3단계 상황에서 마트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생각에 5묶음을 샀다"는 직장인 류아무개씨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기사 속 사진을 보면 라면 코너에는 한 사람만이 서서 판매대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재기를 떠올리면 텅텅 비어 있는 매장이나 물건을 잡기 위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연상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은 없었습니다.
한국 기자들만 알 수 있는 사재기 조짐
▲ 사재기 조짐 관련 기사들. 파이낸셜 뉴스는 “거리두기 격상 우려에 소비자들이 사재기에 나서면서 16일 오후 서울의 한 창고형 매장 가공식품 코너가 텅 비어 있다”면서 훈제슬라이스 진열대가 비어 있는 사진을 올렸다.
ⓒ 쿠키뉴스, 파이낸셜뉴스 캡처
한국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마트에 갔다가 와서 사재기 관련 기사를 작성해 보도했습니다.
쿠키뉴스 박태현 기자는 대형 마트 생수 진열대가 비어 있는 사진에 '사재기 조짐 군데군데 비어있는 생수 진열대'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 진열대의 생수만 비어 있을 뿐 좌측과 우측, 뒤편에는 생수가 꽉 차 있습니다.
도대체 박 기자는 진열대 일부가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떻게 사재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제목에 썼을까요? 저 같은 기자는 알 수 없는 예지력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파이낸셜뉴스 강규민 기자는 '현장르포'라며 '초유의 셧다운 온다.. 생필품 사재기 조짐'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강 기자는 훈제슬라이스 판매대가 비어있는 사진에 "거리두기 격상 우려에 소비자들이 사재기에 나서면서 16일 오후 서울의 한 창고형 매장 가공식품 코너가 텅 비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생수, 라면, 쌀을 사재기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훈제슬라이스'가 사재기 때문에 품절됐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혹시 마트에서 해당 상품을 저렴하게 팔거나,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소비자들이 구매한 것은 아닐까요?
대형마트 소속 협회 주장을 홍보하는 기자들
코로나19로 확진자가 하루 1천 명이 늘어나는 등 심각한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마트의 라면이나 즉석밥 등의 매출이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이런 사실만으로 사재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는 뭔가 이상합니다.
▲ 거리두기가 3단계로 격상해도 대형마트 영업을 계속 허용해달라는 한국체인스토어협회는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들이 회원사로 있다.
ⓒ 한국체인스토어협회 캡처
기자들은 '3단계 격상에도 영업을 계속해달라'는 한국스토어협회의 주장을 기사에 담고 있습니다. '한국스토어협회'는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마트가 회원사로 있는 곳입니다.
거리두기 3단계가 시행되면 대형 유통시설(종합소매업 면적 300㎡ 이상)은 영업을 할 수 없습니다. 대형마트 관계자들은 생필품을 팔기 때문에 대형마트의 영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제주도 등 섬을 제외하고는 인터넷 쇼핑과 배송이 생활화됐기 때문에 굳이 마트를 가지 않아도 충분히 생필품을 살 수 있습니다. 요새는 새벽배송, 1일 배송 등이 있어 집에 생필품이 떨어져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대형마트가 인터넷 쇼핑에 익숙하지 못한 노령층을 대상으로 주간에 일시적으로 영업을 하거나 배달 서비스를 하는 등의 방식을 채택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날 수 있으니 무조건 영업을 허용한다는 대형마트 소속 협회의 요구나 기자들의 '사재기 조짐' 기사들은 과하다 못해 오히려 사재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듭니다.
'화장지 대란'의 원인은 가짜뉴스와 인터넷 루머
▲ 화장지 대란이 발생한 원인은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와 루머 때문이었다.
ⓒ 연합뉴스TV 캡처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화장지 대란'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화장지 사재기 때문에 마트에서 서로 싸우는 동영상도 뉴스에 보도됐습니다.
화장지 대란이 일어난 이유는 세계 최대 화장지 수출국인 중국의 공장들이 가동이 중단돼 물건이 줄어들 수 있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루머와 가짜뉴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연합뉴스TV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화장지 사재기 행동은 SNS로 촉발된 비이성적인 집단 사고방식의 분명한 예"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람 심리가 물건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불안해서 더욱 구매를 하고 싶어 합니다. TV홈쇼핑에서 '매진 임박'이라는 자막과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이런 심리를 이용한 판매 전략입니다.
언론은 가짜뉴스와 루머 때문에 발생하는 '사재기'라는 비이성적인 집단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것을 우려하고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부 한국 기자들은 생필품이 부족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안감을 유발해 '사재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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